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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교부들의 신앙(1)-성상과 성화

by cecile_j 2023. 8. 22.

예수 성심 이콘

 제임스 기본스의 <교부들의 신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남긴 글들을 통해 초대 교회 전통이 가톨릭 교회를 통해 지켜지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매우 유익한 내용이 많아 이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소개해 보려고 한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살짝 언급한 바 있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우상 숭배에 대해 자주 지적한다. 이때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은 십계명에 관한 부분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중략)....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탈출 20:3~5

 

우상 숭배와 관련해서 나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신상이란 신이 아닌 것을 형상으로 만들어 신처럼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으나, 개신교 성경을 찾아보니 신상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로 되어 있다. 그럼 교리의 차이가 이 용어의 차이에서 생겨난 것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톨릭 성경에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구절이 있긴 있다.

 

주님께서 호렙 산 불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조심하여,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나, ........(후략)
신명 4:15~18

 

 우상 숭배에 관한 신명기의 이 구절에서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하셨던 두 가지 이유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하느님의 모습을 특정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 외의 다른 것, 짐승이나 천체 등의 자연물을 신으로서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명기 4장에는 개신교 성경도 마찬가지로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라는 구절이 나와 있다. 이 근거는 신약 시대에 말끔히 해결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까.

 개신교 신자와 종교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우상 숭배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그건 그 상 자체를 신으로서 섬기지 말라는 것 아니야?'라고 물어보면 하느님께서 형상을 만드는 것도 금하셨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열왕기 상권 6장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커룹(케루빔) 형상 수십 개에 금을 입혀 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그 시대 율법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충돌되는 율법을 주셨단 말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 형상을 만드는 것까지 금하신 거라면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사진 찍는 행위까지 모두 죄인가? 그런데 그건 또 아니란다. 그 말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형상은 만들어도 되지만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영성을 지닌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들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아니면, 만들어도 되지만 교회에 세워 놓으면 안 된다는 걸까? 세워 놓는 것까지도 괜찮은데, 그 앞에서 기도하면 안 된다는 걸까?

 

 이를 풍자한 이야기가 <교부들의 신앙>에 나온다.

 

  목사     가톨릭 신자들은 성상에 기도를 한다지?

  친구     가톨릭 신자들은 성상 앞에서 기도하지만, 성상 그 자체에 기도하지는 않네.

  목사     그러나 속으로 가진 그런 의향을 누가 알아주나?

  친구     자네는 밤에 잠들기 전에 기도하지 않는가?

  목사     안 할 수 있나? 침상 앞에서 하지.

  친구     그렇지. 침상 다리에 대고 기도하는 것이지?

  목사     이 사람, 그럴 수가 있나? 그런 의향은 조금도 없네!

  친구     그러나 속으로 그런 의향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나? [각주:1]

 

 물론, 기도하는 이의 의향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실 것이다.

 

 또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글도 소개되어 있다.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절을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유치원생이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각주:2]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서 <신정론>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성상 공경에 대한 의견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유형의 성상은 내적 심상의 물적 표현일 뿐이다. [각주:3]

 

 그러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내적으로 어떤 심상을 떠올리게 되는데, 성상은 이 심상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상 앞에서 기도하든 다른 곳에서 기도하든 내적인 심상을 가지게 되는데, 이 심상 역시 심상이 표상하는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성상이나 성화가 눈앞에 있으면 그것이 표상하는 존재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성상을 '향해' 기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느님 존재 자체가 아닌 외적인 형상에 집중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개신교인들도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까 싶어 예수님 뒤에서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도 형상에 집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나? 오로지 예수님 존재 자체에 집중하거나, 내적으로만 예수님을 떠올리며 기도해야 한다면 말이다. 또, 주님의 '이름'이 찬미 받으시라고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이름'도 주님의 존재 자체는 아니잖은가?

 

 특히 개신교인들의 불만은 성당 마당에 성모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우상 숭배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개신교에서 자주 지적하는 우상 숭배의 문제는 성모 공경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함께 제기되곤 하는 문제다. 가톨릭 신자들은 흠숭지례와 상경지례, 공경지례의 차이를 알고 있다. 논의가 여기까지 다다르면, '성모상을 세워 놓고 자꾸 기도하다 보면 흠숭인지 공경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데 헷갈릴 게 뭐가 있냐고! 

 

 성모님께 하는 기도는 전구 기도이며, 성모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은 전능하신 주님께로부터 나온다. 전구를 청하는 것은 힘든 일이 있을 때 가까운 이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그럼 이 땅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도해 달라고 청해도 되고, 하늘에 계신 존재에게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하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과 가까운 성모님께 기도해 달라고 청하면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실까. 그런데도 흠숭이나 공경이나 그게 그거라고 우기는 것은, '아냐. 너희들 틀림없이 하다 보면 헷갈릴 거야. 헷갈려야 돼.'라고 하는 셈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몰라도 하느님은 명확히 구분하신다. 제임스 기본스는 <교부들의 신앙> 제15장 '성화와 성상' 편을 끝맺으며 이렇게 쓰고 있다.

최근에는 프로테스탄트도 성상을 모시는 의의를 차츰 깨닫고, 이를 우상 숭배라고 혹평하던 태도를 버리는 듯하다. 프로테스탄트 예배당 꼭대기에도 십자가가 보인다. 일찍이 보이지 않던 이상한 현상이다.[각주:4]

 

 참고로 제임스 기본스는 1834년 태어나 1921년 선종하신 분이다.

 

 

 

 

 

 

 

 

  1. 제임스 기본스, 장면 편역,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 출판사, 1964. [본문으로]
  2. 제임스 기본스, 장면 편역,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 출판사, 1964. [본문으로]
  3. 제임스 기본스, 장면 편역,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 출판사, 1964. [본문으로]
  4. 제임스 기본스, 장면 편역,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 출판사, 19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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